Umlaut
생생회화, 화이트블럭 전경 2021
<Umlaut>, Architectural motion graphic, mapping, 3min 10sec, 2021
<움라우트> 건축설계기반의 모션그래픽, 프로젝션 맵핑 3분 10초, 2021
<Umlaut>, Architectural motion graphic, mapping, 3min 10sec, 2021
<움라우트> 건축설계기반의 모션그래픽, 프로젝션 맵핑 3분 10초, 2021
경기문화재단_박윤주작가
<결코 덧없지 않은>
●정일주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박윤주의 회로엔 여러 가지 작업들이 동시에 가동되고 있다. 많은 이야기와 사건이 각각 영역을 차지하고, 교차되거나 중첩되면서 아직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머릿속을 유영한다. 그 중엔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시대의 역사도 있으며, 이미지를 다른 식으로 체감케 하는 실험적 요소도 있다. 예술적 가능성의 수로를 다각적으로 파고드는 박윤주, 그 의지의 끝은 어디일까.
그런 그가 사후세계이자 중간세계를 의미하는 <움라우트>를 선보인다. 사물의 의미론적 죽음-과정과 그 이후의 생동에 대해 고민하는 작업은 죽음의 과정보다 사후세계에 더 집중함으로써 판타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앞서 퍼포먼스 위주의 작업들을 통해 현존하는 사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생동감을 끄집어내 물성이 제시하는 사회·문화·정치·역사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려 노력했던 작가는 이번 작업을 기점으로 물성을 완전히 배제,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변이시켜 가상세계에 대한 정착을 시도한다.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 인식한 작가가 전에 없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스스로 “가상과 실재를 넘나들며 사물과 지형을 그리는 작가”이길 원하는 박윤주에게 지금껏 만든 궤적과 현재 자신이 선 위치에 대해 물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미디어와 공공재 그리고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통해 고민한다”는 주관을 드러낸 바 있다. 그 내용이 너무 크고 방대해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들리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겠나?
: 끝없이 방대할 수도, 극도로 사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 작업은 주로 개인적으로 지나다니는 아파트나 도로, 그리고 시설 앞에 설치되어있는 공공미술조각품을 매개로 했다. 때문에 오브제를 선별했다기보다는, 늘 보였지만 그 누구도 보지 않았던 조각들을 가까이 가서 관찰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현대미술의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생경한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이미지-결과물이 얼마나 성공적이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오브제의 사후세계’를 가상공간에서 서사한다는 것 자체가 내 나름의 동시대적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구체적인 이미지와 서사를 통해 쉽게 읽힐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도, 지나친 관념보다는 명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지금까지의 작업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한다면? 또 각 분류의 특성과 대표작품을 말해 달라.
: 작업은 실재영역과 가상영역에서 사물의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사물의 운동은 2014년 보안여관 개인전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를 통해 처음 선보였고 <핑크 투 그레이>는 베를린 막스 골키 극장(2015)에서 상영되었는데, 그 전시과정에서 제작한 <고잉곤>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오브제와 공공성, 그리고 예술전시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후 2016년 드레스덴 미술관과 인천아트플랫폼의 동시 개인전인 <자유로운 제로>와 <수박의 무게>를 통해 공공성을 확장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라이브 퍼포먼스와 영상도큐먼트를 근간으로 한 <보겐라움 프로젝트>(2019)를 통해 온라인 전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2019년을 기점으로 가상영역에서의 예술오브제의 가능성에 대해 가상건축설계 협업을 통해 서 이야기하게 됐다. 최초의 가상오브제 작업 <비파랑 조각>은 건축설계와 3D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을 통해 사물의 실존을 가상세계로 옮겨와 그 방향과 무게를 이야기한 것이다. <핑크 투 그레이_자라디스플레이와 아나스탸샤>, <오렌지 투 블루_노인과바다> 그리고 <레드 투 그레이> 역시 실재 오브제의 의미론적 죽음이후의 사후세계를 가상공간 설계를 통해 구현하며, 이에 존재하는 가상 오브제의 생동감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15h_Under the shadow>, <블랙 투 블루>처럼 비관적이며 파괴적 스토리를 가지고도 세련되며 실재(實在)같은 영상으로 구현한 바 있다. 그런데 왜 신작들은 3D 애니메이션 등 미디어를 동원하고 있나?
: <움라우트>만 놓고 이야기 한다면, 공공미술조각품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실제로 형태변이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15h_Under the shadow>, <블랙 투 블루> 같은 필름은 실제 퍼포먼스가 모든 영상보다 앞서있는 현장성 중심의 작업이다. 우연에 기대어 사물의 생동감을 구현하는 과정으로, 촬영당시의 환경조건과 장소성과 어우러져 작업이 완성되었다. 사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생동감을 표현하려던 이전 방식과는 달리, 이번 작업을 통해서는 사후세계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 다른 세계의 지형을 새롭게 세우고 그곳에서 부활되어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3D 모션그래픽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건축물 미술작품을 비롯한 공공미술에 다양한 커넥션과 불합리한 이익배분이 존재한다는 문제를 많은 전문가가 비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행정 구축이 요구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공공미술의 암울한 현주소’라 단언하며 개인 작업에 이 주제를 끌고 올 필요는 무엇인가?
: 사사로운 한 가지 에피소드가 그 발단이었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라는 아파트 부녀회의 현수막이 걸리면서 그것은 오른쪽은 나뭇가지를, 왼쪽은 아파트 앞에 세워진 조각을 지지대 삼았다. 여성이 옷자락을 날리며 서있는 황동토르소 조각에 현수막을 지지하기 위해 동상의 목과 허리부분에 밧줄을 칭칭 감은 것이었다. 덕분에 십 수 년을 살며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조각품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저런 동상이 있었던가? 언제부터 저기에 설치되어 있었지?
이것이 공공미술조각에 대한 연구의 시작이었다. 실제 도큐먼트나 리서치 작업을 통해 공공미술조각이 건축물 앞에 세워지는 과정의 부패성이나 한계를 강조하는 것 보다, 사후세계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을 창조하여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다른 각도로 인식하고자 했다. 때문에 새로 진행하는 작업에서는 암울한 무드를 완전히 제거하고 판타지적 초현실 분위기를 강조한다. 오브제의 의미론적 죽음은 내가 선고했다기보다 이미 죽어있는 미미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사후세계라는 개념과 쉬이 매칭된 것이다.
“공공미술의 맥락에서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연구한다”고 스스로 강조하는 덕분에 종종 ‘공공미술에 대한 해석의 기준과 경계’에 관한 공격을 받는다. 작가가 추구하는 ‘공공미술’이란 키워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 내가 추구하는 공공미술이란 공공영역(온라인 오프라인을 포함하여)에서 발생하는 미술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공공미술의 개념(지역연계작업과 공공조각품, 공공디자인)을 넘어선 풍부한 개념으로써의 활동을 의미한다.
공공영역의 의미가 디지털 가상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는 요즘, 변화된 예술가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인터넷 영역은 새로운 광장으로 역할을 하지만, 인터넷 예술운동과 작업들은 효력과 기반이 약하다는 점을 주목한다. 과거 유럽 20세기 후반의 예술운동들과 비교하여 동시대 예술의 효과적인 공공성 획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로의 공공 지형 확장-변이를 통해, 새로운 건축지형을 설계하는데 관심을 두고 작업하고 있다. 또 사물의 운동성이 어떻게 이러한 시간베이스의 영역-인터넷과 증강현실-에서 공공미술화 될 수 있는지도 실험한다. 현재 예술의 공공성과 생동감에 대한 온라인 흐름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 연구는 바우하우스 석사시절 연구인 ‘예술시위의 모션과 모습’에 근간한다.
박윤주의 작업에서 ‘공공’이란 혹은 ‘공공미술’이란 어떤 정의를 갖는가?
나에게 공공성이란 편의상 부유한 의미로써의 다중(multitude)으로 해석된다. 다중은 대중이나 민중처럼 어떤 집단 또는 계급을 지칭하기 보다는, 일종의 네트워킹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즉, 특정한 상황을 공통의 태그로 부름으로써 그 특이적인(singular)것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지평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공통화 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그 무엇인 셈이다. 정체성적인 혹은 재현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질 들뢰즈가 말하는 [-ceive] 생각하는 것을, [con-] 결합하는 것, 생각들을 네트워크 시키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연결시키는 것, 결합하는 것으로, 실체는 없지만 링크되어 있는 어떤 상황이라 보면 될 듯하다. 이 링크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현대미술이자 공공미술이라 여기고 있다. ■